울산 태화루 전경.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울산은 풍수상 균형이 어울린 지세
양기혈이 흐르는 꼭지점이 태화루
태화루 재건축 오늘의 역사적 가치

 

 해가 부쩍 짧아진 요즘, 저녁무렵 태화루에 오르면 탄성이 절로 터진다. 멀리 은월봉 위로 펼쳐진 하늘길에 노을이 띠를 두르고 아래로 강심이 웅성거린다. 고래축제를 마중 나온 앙증맞은 고래가 푸른빛을 품고 둥실거리는 자리에 강안의 물새떼와 수초들이 포르르 몸을 비튼다. 호흡이 잠시 멈추면 삼호 방향으로 마지막 햇살이 긴 꼬리로 물결을 후려치는 장면에서는 숨이 멎을 지경이다. 이 풍경이 올여름 끝자락 무시로 비명을 질렀다. 두 번의 태풍이 할퀴고 지날 때, 10,000년 풍광도 잠시 휘청거렸다. 그래도 위풍이 관록이라 당당함으로 쭉 뻗었다. 오늘 울산여지도에서 조망할 일곱 번째 주인공 태화들이다.
 태곳적부터 풍수는 바람 못지않게 수세(水勢)가 대들보 역할을 했다. 수세 중에서도 물이 빠져나가는 파구는 풍수의 으뜸이다. 울산의 수세는 가지산 자락, 여러 겹의 골짜기에서 물길이 합쳐져 울산 땅을 에둘러 흐른다. 물은 혈장을 감싸고 천천히 흘러야 생기가 곳곳에서 잉태하기 마련인 법. 완만한 지세에 굽이친 자락이 급하지 않은 땅에 물길이 도니 짧은 수맥이지만 무시로 양기를 뿜어내는 땅이 울산이다. 그 물길이 바다로 흐르는 꼭짓점에 전망대처럼 솟은 언덕이 태화루다.
 가지산에서 발원한 태화강이 하구로 흐르다가 바로 여기 먼발치로 나그네를 쉬게하는 지점에 이르러 소용돌이를 친다. 용금소다. 예로부터 용금소와 태화루는 울산의 첫 번째 경관이었다. 여기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면 이마 위로 동해로 달려가는 태화의 굽이친 물살이 내달리고 눈썹 아래로 이수삼산(二水三山)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남산 열두 봉이 병풍을 치면 왼쪽으로 왕생이 들판이 는개 더미에 묻혀 아른거린다. 
 울산의 혈맥인 태화강은 태화사 앞을 흐르는 강이라 태화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태화'는 '울산'의 다른 이름이다.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에서 스승을 배알한 뒤 10여 년을 수행한 자장이 귀국한 항구가 사포다. 지금의 반구동 일대인 사포에서 들안을 바라보면 용금소는 첫 번째 길지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품고 사포로 돌아온 자장의 뇌리는 '호국불교' 네 글자가 박혀 있었고 그 발원을 이룰 불국성지가 태화와 통도, 월정으로 솟아올랐다. 
 바로 그 태화사는 지금 동강병원 서편의 반탕골 일대에 창건했고 태화루 자리는 웅장한 사찰의 입구였다. 태화루는 엄청난 역사와 스토리를 가진 누각이다. 기록이나 증거가 많지 않아 천년을 훌쩍 넘긴 세월을 이야기하기엔 근거가 부족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각의 위치와 뿌리다. 기록을 들춰보면 태화루의 원형격인 태화사는 신라 때인 647년 건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 태화루의 기록은 따로 없지만 고려 성종이 997년 울산을 찾아 태화루에 올라 신하들과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은 그 뿌리를 웅변한다. 장소성은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다. 특정 장소에 이야기가 입혀지면 명소가 된다. 그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따라 내용과 모양이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원형이다. 바로 태화루에는 그 원형이 존재한다. 자장의 이야기부터 고려 성종의 이야기와 고려와 조선 유학자들의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곳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고려 초기 임금 성종이 재위 마지막 해인 997년 가을에 울산으로 행차했다. 임금이 울산을 찾아 신하들과 연회를 펼친 곳이 바로 태화루였다. 놀라운 기록은 그다음이다. 성종이 태화강을 그윽하게 바라볼 무렵, 강심에서 갑자기 큰 바닷고기(고래로 추정) 한 마리가 난데없이 솟구쳤다. 백발의 노인이 얼른 붙잡아 동해 용왕의 선물이라며 임금께 바쳤다. 아뿔싸, 기쁨도 잠시 고래를 받았던 임금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병환이 나서 다음 달에 승하했다. 영물을 잡은 노인의 이야기는 빠져 있지만, 자책감에 밤을 도운 노인의 뒷이야기는 풀어놓지 않아도 사필귀정이다. 이 이야기로 미루어보면 고려조까지 태화강의 강심은 제법 깊이가 있어 향유고래급 대물도 지금의 사연리 주변까지 유영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울산이 고래의 안식처였다는 증좌다. 
 태화루가 사라진 것을 두고 조일전쟁 때 불에 탔다는 설과 고려 때 왜구의 손에 훼손됐다는 설, 인위적으로 옮겼다는 설 등이 분분하지만 문화해설사는 "조일전쟁 때 불타 사라졌다가 울산시의 노력으로 복원됐다"고 이야기한다.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를 사실인 양 읊고 있는 울산의 역사는 비단 이뿐이 아니다. 자료가 부족하고 학습이 모자라니 지역사는 왜곡이 일상이다. 인문학적 뿌리는 깊은데 그 뿌리를 제대로 들여다볼 노력이 없으니 천박한 ~카더라가 판을 친다. 
 태화루 복원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태화루는 복원이라 말하면 곤란하다. 예식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은 누각은 오늘의 태화루다. 조선조 현종 8년 울산객사 학성관이 복원되면서 그 문루에 태화루의 옛 현판을 달아 다시 태화루라 이름했다는 사실이 '울산부읍지' 등의 기록에 나온다. 일제강점기 때는 태화소학교 정문과 울산도서관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0년 완전히 철거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태화강 용금소 위 벼랑에 있었던 태화사의 서문루에 출발한 태화루가 '원(原) 태화루'다. 지금 시립미술관 옆에 있었던 학성관 문루인 태화루는 원태화루를 모방한 것으로 원태화루와 무관하다. 원태화루나 조선조에 복원한 태화루의 모습을 알 길이 없으니 지금의 태화루는 복원이 아니라 재건축이 정확한 표현이다. 억지스럽게 복원 운운하는 것은 역사성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추한 집착에 불과하다. 오늘의 시점에서 사라진 과거를 되살려 당당하게 재건축했다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건지 돌아볼 일이다. 
 마지막 팁 하나, 태화들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국가정원으로 거듭났다. 이 들판 언저리에 자장이 터를 잡고 창건한 태화사의 불력이 호국으로 이어져 충숙공을 낳았다. 양기가 영근 땅에 인물이 난다는 말이 있듯 태화들 언저리는 나라 일을 하는 인물이 많이 나왔다. 이제 들판과 누각이 새롭게 터를 잡았으니 큰 인물 출현도 머지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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