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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로 그려 낸 기억 속의 울산 (7) 1942년생 서진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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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다예
  • 승인 2018.05.2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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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년 공업탑 공업축제(서진길 作).  
 
   
 
  ▲ 1962년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장(서진길 作).  
 
   
 
  ▲ 1960년대 성남동 오일장(서진길 作).  
 
   
 
  ▲ 1960년대 베밀레기(서진길 作).  
 
   
 
  ▲ 1960년대 물레방아(서진길 作).  
 
   
 
  ▲ 서진길 구술자가 이야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진길은 1942년 중구 다운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다운동 쪽 태화강은 그의 놀이터이자, 태화강 주변 사람들에게는 문화공간이었다. 중구 성남동에서 문화사진관을 운영하던 외삼촌에게서 사진을 배웠다. 이후 울산의 변해가는 모습과 주요한 사건들을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강을 벗 삼아 동무들도 놀고, 꿈을 키우는 그런 유년기를 보냈어요

자랄 때 범서에서 자랐는데, 그 당시에는 다운리였죠. 1960년대 전 후로는 다 어려웠겠지만 대체적으로 우리 울산은 태화강, 동천강, 회야강이 있는데 그 큰 줄기가 태화강이거든. 그다음에 우리가 구영리에 살면서 다전하고는, 배리끝이라는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작은집 큰집이 서로 오고가고 있는, 한마을 같은 한 울타리권에서 생활을 하고 지냈죠. 그때만 해도 문수산 너머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그런 시대였죠. 저가 우리 외삼촌께서 사진관을 성남동에서 했습니다. 문화사진관이라고. 거기 심부름 겸으로 일을 하면서 사진을 배웠어요. 물레방아는 산업도시가 되면서 없어졌지. 태화뜰 앞에도 물레방아가 있었고, 강가 아니면 물이 안 되니까, 조금 굽이쳐 흘러내려 오는데 막아가, 물이 힘이 있어야 방아가 돌아가지.

◆태화강의 기억

베밀레기라고 강에 자갈이 있는데, 이런 새끼줄을 굵게 만들어가지고 양쪽에 댕겨서 자갈을 밀면 저쪽에 발을 대면 고기가 발쪽으로 밀려 나가요. 태화루를 기준으로 명촌까지 중간중간에 섬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거기서 농사도 짓고, 거기는 배 타고 들어가지. 거룻배라고 있어요. 무 농사가 잘 됐어. 태화강 무가 참 명품이었다. 모래땅에 해야 무가 굵고 시원하고 좀 보기 좋게 자라지. 울퉁불퉁 안 하고. 요즘 같으면 미인같이 자라는 거지. 태화강이 어머니 젖줄이지. 대도섬 쪽으로 내려오면 해초 는 여러 가지가 다 나와. 미역, 진저리 모자반 이런 게 많이 나고, 그때는 몰 이게 굉장히 많이 났습니다.

◆오일장 이야기

울산 오일장이 영남권에서 굉장히 큰 오일장입니다. 성남동 오일장이 없어지고, 요즘 태화시장 있죠. 원조는 성남시장인데, 친정어머니를 보고, 친정 오빠, 친정아버지를 어디서 보냐? 시장에 가서 보는 거라. 어디 포목점에 간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어느 술집에 몇 번 간다. 거기 서 만나는 거야. 해질 때면 그래도 어른 대접할라고 갈치 한 도막 사고, 고등어 한두 마리 사 와요. 냉장고가 없으니까 모두 소금에 절인 거지. 상추고 부추 같은 거 가지고 가서 팔아가지고 생선 사는 거지.

◆영화 보러 배리끝으로 걸어 내려와 울산까지 걸어가는 거야.

구영리에서는 성장할 때까지 살았지. 무성영화 시대 때 영화를 봐야 되잖아요. 울산극장까지. 내가 안내원이지. 옛날 울산극장. 거기 가면 ‘눈물 젖은 두만강’, ‘홍도야 울지 마라’, ‘장화 홍련’, 이런 영화를 쫙 하거든요. 그 당시에는 후라쉬가 없었어요. 짚단 그냥 들면 불이 확 나잖아요. 중간중간에 촘촘하게 묶습니다. 묶으면 불이 확 안 나고 훅 돌리면 불이 빤하게 오고, 또 훅 돌리면 불이 오고. 그걸 가지고 배리끝 길로 다녔죠.

◆다전은 새마을운동 안 했어.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산거지.

새벽종이 울렸네. 이거는 정책적인 측면에서 국가 차원에서 하는 건데, 우리 다전 어른들은 새마을사업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에 가가 지고는 시대가 조금 변해오니까 다전에 있는 아지매들, 주부들도 신발 벗고 모심는 시대가 마지막에는 있었지. 어쩔 수 없이 문화가 그러니까. 동네 아줌마들이 파마하는 거는 70년대쯤 와가 했어, 다전이 좀 늦었지. 다전마을은 다른 마을보다도 한 15년에서 20년 정도 뒤져서 갔어요.

◆내가 사진 배울 때가 사진 전성기 같애.

열아홉에 그때 카메라를 들면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그때는 설, 팔월에 모이면, 또 시골의 운동회에 모이면 가족사진 찍고, 친구들과 기념사진 찍는 시대라 그렇게 볼 수 있어요.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 는 그야말로 사진 문화권 시대라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먹고살기가 어렵고 이러니까 사진관은 그 당시에 최고의 인기였어요. 사진사는 신사 직업이었지. 내가 사진을 배울 때 사진관이 많았는데, 내가 기억나는 거는, 서울 사진관이 있었고, 신라사진관이 있었고, 유미사진관이 있었고, 그다음에 문명사진관이 있었고, 아리랑사진관이 있었고, 그다음에 우리 외삼촌이 하는 문화사진관이 있었고, 대표적 사진관들이 그렇게 있었죠. 이런 사진관들이 울산 시내 전체를 커버하는, 그 당시에는 사진을 안 찍으면 졸업이 안 되는 만큼 상징적이었으니까, 앨범이라는 용어도 없었고요. 요즘 보면 좀 꿈같은 시절이지만 그때 시절이 참 너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업센터 기공식을 목격했죠. 가슴이 벅찼죠.

내가 열아홉 살 때 1962년 2월 3일 날 공업센터 기공식을 했거든. 외삼촌이 거기에 출사를 가는 거야. 지금 장생포 고개 넘어가는 앞에, 개 구리섬 앞에서 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려요. 역사적인 순간이 벌어집니 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을 하고 송요찬 내각 수반이 참석을 하고, 그다음에 경상도지사가 참석을 했고. 기공식장을 봤던 사람이기 때문에 공장 건설 한 사람보다 나는 좀 더 애정이 가죠.

◆중구 성남동, 옥교동 그쪽이 내 사진의 본바탕이지.

현재 하나도 안 변했지. 그거는 길이 안 변했으니까. 원도심 지역에는 관공서 문화가 있거든요. 울산시청도 거기 있었고, 울주군청도 거기에 있었고, 그다음에 경찰서도 거기에 다 있었다. 관공서가 많이 있기 때문에 생활문화가 좀 활성화되어 있죠. 그러니까 먹거리 문화가 아무래도 그 사람들이 사는 게 격이 높고 하니까, 거기로 출장도 많이 오잖아요. 정치 경제 문화가 모두 것이 성남·옥교동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고요.

◆문화공간 다방, 다방에서 역사가 이루어지는 거야.

그때는 곳곳에 다방이 있는데, 정치하는 사람이 가는 다방이 있고, 장사하는 사람이 가는 다방이 있고, 또 문화예술인이 자주 가는 다방이 있고,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가는 다방이 있고, 그다음에 근로자들이 가는 다방이 있고, 이렇게 다섯 개 정도로 분류를 할 수 있어요. 그때는 국제 행사를 했는데, 그 당시에 국제사진전에 참가를 하고, 왕성하게 할 때 울산에는 화랑이라는 게 없잖아요. 그런데 화랑이 아니면 국제 전시를 못 해. 그래가 명다방을 명화랑 해가지고, 국제 전시회도 하고 이렇게 해나갔습니다. 대체적으로 다방에서 역사가 이루어지는 거야. 정리=이다예 기자/제공=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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