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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길 주필 회상록] 뭐 하러 왔노 <19> 보도지침 폭로·5공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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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길 주필
  • 승인 2021.04.28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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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증언을 하고 있다. 중앙일보 발췌

85~86년 ‘언론 보도지침’ 584건 월간 『말』지서 폭로
매춘관광 여파, 아시안 게임 후 ‘에이즈’ 환자 늘어
‘5공 청문회’서 비리 폭발… 전두환 백담사로 유배

전두환 정권은 언론에 대한 광범위한 통제와 포섭으로도 모자라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문공부 내의 홍보 조정실을 통해 각 언론사에 매일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사실상 언론의 제작까지 전담하려는 기이한 작태를 보였다.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은 청와대 정무비서실 지휘하에 있었다.

이 보도지침은 1985년 6월 해직 기자들로 구성된 민주언론협의회(민언협)의 기관지로 창간된 월간「 말」지 86년 9월호가,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의 자료를 폭로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 말」지 는 85년 10월부터 86년 8월까지 문공부가 각 언론사에 시달한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하게 되었다. 공개된 보도지침은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당시「 말」지 를 담당했던 서울 마포경찰서는 보복인사까지 당했다. 치안본부 「 말」지  담당 형사 역시 좌천됐다.
전두환 정권은「말」지 발행인 합동통신 기자 출신 김태홍 의장(민언협)과 신홍범 실행위원 그리고 자료를 제공한 김주언 기자를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했다. 1987년 5월 13일 이들에 대한 제 5차 공판 땐 민언협 신임의장 송건호와 박권상 동아일보 전 논설주간이 변호인 측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날 선고공판 사실과 재판장에게 박수를 보낸 방청객들의 이야기는 중앙·동아·한국일보가 모두 박스기사까지 따로 써서 보도했으나 일부 신문은 여전히 보도지침을 충실히 이행, 침묵을 지켰다. 
한편 정계에서는 양김의 분열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군정종식을 못한 YS와 DJ의 변명이 주목을 끌었다. 자주 나타났던 ‘양김’의 스타일 차이가 후보 단일화의 실패에 대한 변명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진실성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건 DJ이는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의 말을 했다. 남의 생각과 시선을 의식할 줄 안다는 것이다. 반면 YS는 시종일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 했다며 그 정당성을 강변하였다.
두 사람의 스타일 차이에 대한 평가를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고 명암이 있다는 것이다.
둘 모두 똑같이 공유하고 있었던 건 매우 강한 자기중심주의였다. 많은 사람들이 양김의 그와 같은 자기중심주의로 인한 분열을 비판했지만, 그건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 착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 그들에게 그와같은 자기중심주의 ‘독불장군’ 근성이 없었다면, 그들이 적어도 유신체제 이후 15년 간의 그 힘겨운 민주화 투쟁을 계속해올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들의 분열과 민주화 투쟁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정부와 국회가 사실상 매춘관광을 묵인하면서 ‘20세기 페스트’로 불린 신종 전염병 에이즈 감염자가 크게 늘었다.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1985년 1명에 불과했던 에이즈 감염자는 86년 5명으로, 87년에는 14명, 올림픽이 열린 88년에는 무려 24명이 늘어나 36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89년에는 73명에 이르렀다. 
정부가 에이즈 예방책을 마련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외국 관광객은 제쳐놓고, 내국인 그중에서도 유흥업소 종사자들만 대상으로 강제검역에 나섰을 뿐이었다. 
1988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공약에 따라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화위)가 발족했다. 민주화의 이행 약속과 광주항쟁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겠다며 만든 것이었다. 노태우는 민화위를 대통령 자문기구로 두고 광주항쟁 진상 파악과 치유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88년 4월 총선으로 조성된 ‘여소야대’ 국회에서는 청문회 등을 신설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한편 국민적 요구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이른바 ‘5공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TV로 생중계된 청문회는 30여년이 훨씬 지나서도 생생하게 기억되지만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6공화국 하에서의 ‘5공 청산’ 작업이 시작됐다. 초창기 국회 내의 청문회를 통해 다루어진 의제는 ‘광주사태 진상규명, 군부책임자 처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조작규명, 전두환 친인척 비리 척결, 정경유착 규명, 1980년 언론 통폐합 및 기자 강제해직 규명’ 등이었다.
전두환은 ‘5공 청문회’ 전 이미 4월 13일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지만 그것만으론 어림도 없었다. 5공 특위 활동으로 5공 비리가 점점 더 밝혀지면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내용의 사과 성명을 장장 25분동안 낭독하고 강원도 백담사로 향했다. ‘현대판 유배지’ 백담사는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이 골라준 곳이었다.
전두환-청와대 사이의 조율을 거쳐 작성된 사과성명과 관련해 첨예하게 논란이 된 부분은 정치자금에 관한 것이었다. 전두환 측은 정치자금은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며 오리발을 내밀었으나 5공인사들이 적지 않은 선거자금을 지원받았다. 
정치자금 문제는 노태우 6공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했던 까닭에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대선당시 노태우는 전두환으로부터 공식 선거자금의 몇 배에 이르는 정치자금을 지원 받았다. 그러니 이를 어찌 다 까발릴 수 있었으랴. 노태우 역시 YS정부가 들어선 후 감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장난’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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