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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기획-‘울산여성독립운동 톺아보기’】 (5) 사회로 나온 여성들백승아(굴화초 교사·기억과기록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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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령녀자살 ?철도에 깔려' (동아일보 1929년 6월 30일자) 경남 산청군 출신의 접객업 노동자가(21세, 여성) 울산역 도착 열차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접객업 여성노동자들이 팔려 다니는 신세를 비관하여 일어나는 사건이 신문에 자주 실렸다.  
 
   
 
  ▲ 경성여자청년회 ‘자유결혼문제강연’ (동아일보 1926년 2월 24일자) 여성단체가 주최한 강연회에서는 여성 스스로가 여성과 관련된 문제를 공론화하고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울산지역의 여성단체 강연회의 모습도 짐작해볼 수 있다.  
 

*표 첨부





1.프롤로그

2.울산여성독립운동사를 시작하며

3.울산여성, 식민지를 살다

4.학교에 간 여성들

5.사회로 나온 여성들

6.울산의 여성독립운동가

(1)이순금(1912~?)

(2)이효정(1913~2010)

(3)손응교(1917~2016)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깜짝이야.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버렸다. 이게 내 목소리였구나. 이게 내 발소리였구나. 갓난아기였을 때 큰 소리로 울었던 적을 빼고 사람들 앞에서 고함을 질러본 일이 또 있었던가? 장터에 함께 나온 친구 복순이의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



처음이지 않았을까. 공적인 공간에서 큰 소리로 자신의 요구를 외치는 경험. 장터에서 사람들 속에 섞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어느 여성 청년의 마음을 상상해보았다. 사회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이 조금씩 또렷하게 보이는 순간이었으리라. 복순이라는 이름은 1927년 열여섯의 나이로 울산여자청년회의 회장을 맡았던 김복순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사실 1920~1930년대 울산에 사는 김복순이라는 이름은 크게 두 가지 사건으로 신문에 등장했다. 울산여자청년회의 회장으로, 그리고 연애 추문에 휩싸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의 주인공으로서였다. 김복순은 일제강점기 사회 속에서는 억압과 탄압을 받는 조선인으로서, 조선인 사회에서는 남성중심의 사회구조속의 여성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복순과 같은 많은 여성들은 일제에 의한 억압과 남성중심 사회구조의 차별이라는 중첩된 어려움 속에서도 사회운동,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목소리를 내며 3.1운동에 참여했던 경험이 수많은 ‘복순’들을 사회운동의 한복판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전국적으로 여성단체가 조직되는 가운데 울산지역에도 울산부인회, 언양여자청년회, 울산여자청년회, 울산부인상회, 울산여자친목회, 근우회 울산지회 등의 여성단체가 조직되어 교육·계몽운동 기부·모금운동, 문화운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여성단체가 주최한 강연회는 여성문제를 다룬다는 점, 여성도 강연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성의 생활, 여성의 권리에 관한 문제를 가정의 문제나 개인적인 문제로 제한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로 보며 공적인 영역으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여성단체의 강연회는 듣는 위치에서 말하는 위치로, 수동적인 계몽의 대상에서 능동적인 근대적 주체로서 달라진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열성적으로 강연하는 여성 강연자와 이를 경청하는 남성 청중의 모습은 매우 새로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이여, 인형이 되지 말자.”, “경제적으로 독립하라”,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라”는 여성 강연자들의 외침은 울산 지역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여성단체의 기부·모금활동 중에서는 1931년, ‘만주 동포 구제 연주회’를 열어 20여원을 모금하여 기부한 울산기생조합의 활동이 눈에 띈다. 사실 기생조합은 일제가 조선의 기생들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한 만든 조직이다. 일제는 기생조합을 통해 기생들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처벌했고 이를 선전함으로써 조선인 여성들 전체를 위협하며 통제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제의 의도와 달리 기생조합은 기생들이 힘을 모아 일제에 저항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조합의 기생들이 만세운동·여성운동·노동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조합에서 하는 기생 양성 교육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종의 학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성단체는 보다 단단해진 조직력을 바탕으로 어린이날 행사, 여자운동회와 같은 지역의 대규모 문화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1931년 10월 17일 오전 9시, 울산역전 운동장에서는 울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여자운동회가 열렸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특히 마지막에 진행된 각 야학 대항릴레이와 주최 측의 가장행렬이 재미있었다”, “수천 관중을 감동”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힘껏 달렸던 여성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여성해방’, ‘민족해방’이 살갗에 와 닿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여성단체의 사회운동은 근대적 학교 교육을 받은 이른바 ‘신여성’들이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교육의 기회와 사회활동 참여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여성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은 지역 사회의 곳곳에서 농어민, 해녀, 공장노동자, 접객업 노동자, 기생 등으로 일하고 있었다. 가족중심의 농업 경영이 이루어진 조선의 농촌에서 여성은 가사노동과 농업, 어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주요 노동자였다. 하지만 여성노동자의 노동은 보조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고 경제적 보상이 없는 그림자노동이었다. 임금을 받더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낮은 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점점 더 가혹해지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왔고, 여성노동자들의 각성과 이들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울산지역에는 해녀들과 항구의 접객업 노동자들의 저항 운동이 포착된다. 울산 바다는 우뭇가사리가 많이 채취되어 매년 많은 제주 해녀들이 찾아와서 조업을 하는 좋은 어장이었다. 그런데 1911년, 장생포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본가가 울산의 30개 마을에서 해조류 어장을 매입하고, 일본인 어민을 데리고 와서 우뭇가사리 채취어업을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어장을 빼앗긴 조선인 해녀들은 일본인 어민과 자본가를 상대로 격렬하게 항의했다. 경찰과 헌병이 출동해서야 진압될 정도의 격렬한 무력 충돌까지 일어났다고 당시 신문은 전한다. 이처럼 일제 시기 농민운동 및 노동운동은 일제의 자본에 저항하는 항일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울산의 장생포, 방어진 등 항구지역에는 일찍이 일본 어업자본이 진출하였고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으며 노동조합이 조직되는 등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오고가는 항구의 거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상상해보자. 고래잡이의 호황은 수많은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을 상대로 하는 요릿집들이 생겨났다. 때문에 여기에서 일하는 접객업 노동자들의 숫자도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조선의 농촌에서 온 여성들이었다. 당시 신문에는 사기나 협박으로 농촌 여성을 요릿집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범죄에 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일제의 수탈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워진 조선의 농어촌 사회에서는 가장 먼저 어린 딸이나 며느리 등 여성 가족구성원이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여성들은 자신의 목숨으로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기에 이른다. 기차에 몸을 던지는가 하면, 손님들의 모욕에 대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면서까지 강하게 항의하는 사건도 있었다. 또, 접객업 노동자 일동이 탄원서를 제출하는 단체행동을 하기도 했다. 방어진의 접객업 노동자 최란선이라는 여성이 병에 걸렸는데 일본인 업주는 약은커녕 밥도 주지 않고 그를 방치했던 것이다. 그러자 최란선은 그동안의 일본인 업주의 악행을 기록하여 경찰서에 고소했으며 주변 동료들은 탄원서를 제출한다. 우리에게 일제시기 고래잡이로 호황을 누렸다고 잘 알려진 울산의 항구에서는 일터를 잃고 격렬하게 싸워야 했던 해녀들과, 부당한 현실에 맞서 저항한 여성노동자들도 있었다.

『울산여성의 독립운동』 1부, ‘사회로 나온 여성들’에서는 기록되지 않아 기억되지 않는 일제시기 울산지역 여성들의 사회운동의 모습을 한 장면, 한 장면 포착하는 수준으로 살펴보고 정리했다. 정지된 역사의 장면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상상해보는 역사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구의 눈과 마음이 되어보는가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글은 여성의 눈과 마음을 가지고 일제시기 울산지역의 사회사를 다시 읽어보려는 노력이다. 그동안 잘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와 희미하게 보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표-1920~1930년대 울산지역 여성단체 조직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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