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공원 정문 앞에 있는 울산 강제징용 노동자 추모비.

 

김진영 편집이

서울중앙지법 재판부 강제노역 손배소 각하 결정
판사가 외교첨병으로 둔갑한 어처구니 없는 현실
추모비 벽면에 새겨진 6,300명 울산 징용자의 한

나라를 빼앗겨 노동을 빼앗겼다/ 노동을 빼앗겨 삶을 빼앗기고.../ 빼앗긴 나라는 되찾았지만/ 빼앗긴 노동은 아직이라...(하략) 지난 2019년 3월 첫날, 이 땅에 삼일 만세 함성이 우렁찼던 때로부터 100년이 되는 날, 울산대공원 앞에 추모비 하나가 섰다. 강제징용 노동자 추모비다. 추모비 벽면에 6,300명의 울산인의 한이 한 땀 한 땀 피의 절규로 새겨져 있다. 그 외침이 바로 동판에 새겨진 시다. 울산의 노동자들부터 코흘리개까지 저금통을 털어 돌을 올렸다. 그 추모비가 성큼 다가온 유월 폭염 아래 지금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재판부가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했다. 쉽게 말해 왜놈에게 끌려가 모질고 참담하게 당했던 강제노역의 시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판사의 판결이다. 재판부는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라는 한일협정 문구를 근거로 개인 청구권도 사라졌다는 쪽에 섰다. 법리적 판단에 충실했다는 사족을 달았지만 그 말꼬리가 오뉴월 땡볕에 달아오르고 있다. 
문제는 이번 판결이 일제강점기에 저지른 일제의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내용뿐 아니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판사 한 사람이 뭉개 버렸다는 점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판결이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일본 기업들에 대한 손해배상 부분이 강제집행으로 처리된다면 일본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도 훼손될 수 있다는 매우 이례적인 정치·외교적인 판단까지 한 부분이다. 갑자기 판사가 대한민국 외교의 첨병으로 깃발을 흔들고 있는 꼴이다. 
여기에다 한일청구권의 배경과 효과까지 분석하는 역사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도 개척했다. 재판부는 “(한일청구권 협정)당시 대한민국이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되는 세계 경제사에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분석의 주석을 달고 한발 나아가 일본이 우리 경제발전에 일조한 부분을 콕 찍어 부각시켰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하는 백성은 농락의 먹잇감이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 때로 돌아가 보자. 능욕과 멸시의 현장에 국가는 없었다. 왕궁의 유품을 전리품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앞잡이들이 궁궐의 담을 넘을 때 민초들은 삽자루와 곡괭이를 들쳐맸다. 결과는 언제나 피의 보복이거나 학살이거나 끌려가 짓뭉개지거나 노예의 삶에 던져지기 일쑤였다. 일제강점기의 시간 동안 벌어졌던 이야기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당했던 멸시와 폭압의 현장을 오버랩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도 모르게 흐르는 압제의 공포에 짓눌린 유전인자가 이번 판결문을 읽는 순간 저 깊은 곳에서 꿈틀대며 되살아나 흥건한 외침으로, 뚜렷한 요구로 펄떡거린다. 문제의 시작은 징용판결이지만 어쩌면 그 뿌리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부터가 맞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탈출구는 경제도약이었고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은 적당한 타협으로 과거사를 덮고 정상 국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광화문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퍼포먼스도 없이 미래를 향해 친구가 되자고 악수할 수 있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총검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은 성과가 급하기 마련, 당장 급전이 필요했기에 일수 이자의 뒷감당은 생각도 못한채 덥석 악수부터 했다. 수완 좋은 왜구의 후예들은 맘 바뀌기 전에 얼른 도장을 찍었다. 그 결과가 반세기를 지나 욕창으로 터져 나와 고름이 흐르고 냄새가 진동한다. 이제 그 지독한 냄새를 우리가 맡아야 하지만 냄새의 출처가 대한민국 법원이라니 이거야 원, 우라질 판이다. 
어디 이번 판결뿐인가. 일본 정부는 최근 도쿄올림픽 공식 홈페이지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즉각 항의했지만 수용할 수 없다고 배를 내민다. 정부와 대한체육회 등은 또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이 문제에 대한 중재를 요청했지만 IOC 역시 수수방관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일본은 침략의 징표였던 욱일기 문양을 올림픽 응원 도구와 유니폼에 페인트칠했다. 욱일기 문양이 그 상징 하나로 고통을 되짚게 되는 이웃 국가들의 아픔의 자국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슬쩍 이미지 세탁에 나선 셈이다. 이번에만 대충 넘어가 욱일기를 유통하면 독도 문제와 함께 국제사회에서 슬그머니 패키지로 용인받을 수 있다는 잔머리다. 일본인들의 역사대처법은 ‘기회주의'다. 임진년 조선 침략 실패 이후 패장의 후손이 자랑스러운 왜장으로 둔갑한 것이나 난징대학살의 소름 돋는 보복이 그렇다. 그뿐인가. 항복방송을 더듬거리며 토해낸 일왕의 치욕을 ‘천황 숭상’으로 포장하고 수도 도쿄 한가운데 살인마와 그 추종자들의 위패를 안치하는 ‘쇼'가 그렇다. 그리고 올림픽을 앞둔 지금, 아베와 스가, 그리고 일본 우익의 잔당들은 참배와 공납으로 왜놈 종자의 찬양의식을 치르고 있다. 신일본제국주의다. 그런 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은 정직하게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하는 일본이 다시 추악한 역사를 되풀이 할 수 있는 길을 연 셈이다. 이제 우리의 시간이다. 그 난장에 들러리가 될 것인지 정부의 선택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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