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해마다 6월이 되면 전쟁의 참혹함을 떠올리게 하는 ‘국민 가곡’ ‘비목(碑木)’이다. 
1950년 6월 북한은 모든 남침 준비를 끝내놓고 7일 ‘조국의 평화통일’을 제창하면서 “8월 4~8일 사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연막작전을 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공모를 위해 이미 1949년 3월과 12월에 모스크바를 극비리에 방문했다. 50년 4월 모스크바를 세번째 방문했으며, 5월엔 중공 모택동을 만났다. 
북한은 6월 25일 새벽 4시 40분 남침을 개시했다. 반면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의 허풍에 가까운 북진 통일론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 전쟁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남한군은 단 15일 동안 국방작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 이하 정부 수뇌부는 비밀리에 서울을 버리고 피난했으며 예고도 없이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최소 500명에서 최대 4,000명이 폭사했으리라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이는 이후의 지옥(地獄)과 같은 아수라장의 작은 시작이었다. 6·25전쟁은 너무나 처참하고 잔인했다.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 등 인명 손실은 3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다. 1,000만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명은 난민이 되었다.
이 전쟁은 20세기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희생 비율이 높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쟁백화점이었다. 어느새 71주년을 맞은 이 전쟁은 이제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북한은 물론 주변 강국의 안보위협은 커지고 있지만 이에 맞서야 할 한국군은 사실상 만신창이 상태다. ‘걸어 다니는 종합 병동’이라는 얘기까지 들린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비바람 긴세월 무명 용사의 돌무덤과 녹슨 철모는 불식촌음(不息寸陰), ‘잠시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말라’ ‘그날을 잊지말라’며 메아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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