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민 사단법인 울산민예총 정책위원장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대중가수인 이승환의 콘서트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필자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의외로 울산예술계의 잠잠한 반응 때문이다. 조용필(1999)은 예술의전당-오페라극장 공연을 위해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으며, 인순이(2008)는 끝내 공연신청이 거부돼 눈물을 뿌려야 했다. 이에 비하면 문화예술회관에서 이승환 콘서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되는 분위기다. 

왜 그럴까? 울산문화예술회관이 예술의전당보다 격이 떨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중문화의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울산문화예술계의 포용적인 태도 때문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격적인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이승환 콘서트가 대관공연이 아니라 기획공연이라는 점 때문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대관공연은 심의위원회를 거쳐야 하지만 기획공연은 내부 결제만으로도 가능한데, 만약에 이승환 콘서트가 심의위원회를 거치게 됐다면 클래식 분야 심사위원의 까다로운 심의를 통과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이승환 공연은 거의 대관공연과 같이 전적으로 이승환의 기획사에서 도맡아 진행할 텐데 이 공연을 문화예술회관에서 기획공연으로 추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심의와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일까? 울산문화예술회관 관계자의 발언에 따르면, ‘과거와 달리 대중문화의 위상이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문화예술회관 역시 고전적인 문화 개념에서 벗어나 시대적 흐름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발언에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 

우선 긍정적인 면은 문화가 ‘최고의 생각과 표현’이라는 엘리트주의적 개념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1930년대 낭만주의 문화비평은 대중문화의 범람이 노동자들의 심성을 파괴하고 무질서를 불러오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위대한 문화’를 통해 노동자들을 ‘교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화예술회관이 순수예술의 ‘성채(citadel)’가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문화 개념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이번 결정은 대중문화에 빗장을 연, 곧 문화에 대한 엘리트주의를 거부한 선언으로 볼 수 있기에 긍정적이다. 

반대로 부정적인 면도 여기에 있다. 만약에 문화예술회관의 문턱을 낮추려는 이유가 대중문화에 대한 개방이 아니라 대중적 인기에 영합한 ‘경영효율성’에 있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진다. 공공재인 문화와 예술이 적자를 이유로 돈이 되지 않는다고 지역문화와 예술의 발전을 위한 공적인 역할을 뒷전으로 해서는 안 된다. 

공립문화시설의 책임자 및 실무자로서 효율적인 경영을 위한 수고와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경영효율성이 공공성을 비켜 가면 시장 논리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문화예술회관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봉사하게 될 수 있다. 

오늘날 문화정책은 시민의 문화적 향수 기회를 증대하는 것을 넘어 시민의 문화표현 활동을 통해 문화적 선호와 향유 능력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정책은 장차 미래 문화소비자의 수요를 증가시키는 동시에 시민의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효율성과 공공성을 통합한 전략이다. 

사실 대중가수 콘서트나 뮤지컬 공연이나 무엇이 다른가? 이승환은 안 되고 이미자는 된다는 것은 또 무슨 기준인가? 울산문화예술회관은 이번 이승환 콘서트를 통해 ‘문턱을 낮춘다’는 핑계로 경영효율성에 뒷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공립문화예술회관으로서 프로그램 재판매에만 신경 써 온 것을 돌아보며, 이제라도 시민의 문화적 권리와 지역예술 발전에 대한 문화예술회관의 공공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이강민 사단법인 울산민예총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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