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근 시인·문화평론

한국 먹거리 문화 중 ‘한식’ 으뜸…‘밥·김치·국’ 삼합
한국인 습식 취미, 국물 내는 재료·레시피 따라 다양
순 우리말 ‘국’…얼어있는 심신 뜨뜻한 국물로 달래

 

푹푹 찌다가 녹아내리는 여름 속에서 ‘가을 씨앗’은 쏜살같은 바람과 물감 갤 판하나 감추고 숨어 있다가 하늘이 열리자 그것들을 흩뿌리며 황급히 달아난다. 우주는 그 행보를 눈치채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우리에게 십일월을 던져준다. 가뭇없이 사라진 가을은 시공간 경계가 애매모호해 사람들도 자연 앞에 서성인다. ‘가을 낭만’ 정취는 찰나일 뿐. 십일월 낮은 늦가을이고 십이월의 밤은 초겨울이다. 일교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면역력이나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감기몸살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짧고 강한 햇살에 산과 들은 마지막 정념을 토해 내다가 밤이면 스산한 바람에 쓸려 바람 자는 골짜기에 낙엽에 묻힌다. 도시골목에도 낙엽이 모여 있다가 새벽이면 외풍에 쓸려 빠져나간다. 십일월 날씨는 온순한 양 같다가도 변덕이 심해 ‘저녁 굶은 시어머니’ 상이 된다. 영하권과 대설 주의보 기상뉴스에 추운 낌새로 사람들 기분도 을씨년스러워진다. 이제부터 찬 기운에 으스스한 몸을 달래기에는 뜨뜻한 국물이 최고다.
한국문화 항목 중 ‘먹거리’에 한식이 으뜸이다. 한식 삼합구성은 밥과 김치, 국(湯)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 습식 취미는 국물을 내는 재료와 만드는 법에 따라 다양하다. 한국인들이 국물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며 오랜 세월 동안 국물요리는 국과 찌개로 나뉘어져 대체로 국물이 많은 것은 국이고, 건더기가 많으면 찌개다. 이런 ‘술적심’ 없는 밥상차림은 허전할뿐더러 어른이나 손님에게 대접예의가 아니다.
대대로 이어지는 국물 문화의 특징은 밥만 먹자니 뻑뻑하고, 국은 재료가 부실하더라도 한꺼번에 끓여 여러 명이 배를 채우기 좋고, 아랫목 온돌 열기로도 데울 수 있으니 편리하다. 한국인들은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도 ‘시원하다’고 한다. 고단한 일상에 찌든 비위를 가라앉히니 속이 개운하고 산뜻하니 가히 자극적인 맛이며, 이에 수반해 국물 맛을 두고 ‘얼큰하다’거나 ‘구수하다’고도 한다. 한국인의 점심 메뉴에 면으로는 짜장면, 짬뽕이 우선이고, 탕으로는 설렁탕, 곰탕 등이 압도적이다. 조선후기 ‘임원경제지’에 수 십 가지 탕이 기록돼 있지만 현대는 퓨전요리 유행으로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음식 재료, 조리 방법을 조합해 만들어 낸 새로운 탕 문화를 창출해 내는 한국인은 음식문화에서도 가히 천재이다.
고기, 생선, 채소 따위에 물을 많이 붓고 간을 맞추어 끓인 음식을 사전적 의미로 ‘국’이라하는데 국은 순 우리말이며 국의 상위 개념이 ‘탕(湯)’이다. 율곡은 격몽요결 제의초(祭儀鈔)에서 제례진설에서 탕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이재(李縡)는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는 ‘탕에 생선과 고기를 쓰면, 갱(羹:무와 다시마 따위로 만든 국)에서는 채소를 쓰고, 단 탕에 어육을 쓰지 않으면 갱에 육을 쓴다’라고 했으나, 이는 유교적 제례의식일 뿐이다.
탕으로써 양대 산맥인 설렁탕과 곰탕 요리법이 비슷하지만 재료에서 차이가 난다. 곰탕은 양지와 사태 등 고기 위주로 끓여 낸 것으로 끓을 때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설렁탕은 사골과 뼈를 오래 고아 만들어 국물 등으로 낸 국물이고, ‘곰탕’은 고기와 깔끔한 내장 등 비교적 고급 부위로 낸 국물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곰’은 흐무러지게 과서 진한 국물만 남도록 푹 끓인다는 뜻의 ‘고다' ‘고아’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즘은 대중 음식이지만 근세에는 설렁탕, 곰탕이 보양식이며 고급 음식이었다. 체험문학인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는 병든 아내에게 설렁탕을 사주기 위해 비가 내리는데도 인력거를 끌고 나온다. 그날따라 손님이 많아 아주 운수가 좋은 날이다. 손님도 많았고 두둑해진 여유로 친구와 주막에서 지체하는 사이 아내는 설렁탕도 못 먹고 절명한다는 내용을 미뤄 짐작해보면 당시 설렁탕은 일반 ‘국’ 차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전국 어디에도 오일장에 가면 ‘국’거리가 널려있다. 가뜩이나 얼어 있는 심신을 뜨뜻한 국물로 달래본다.

이병근 시인·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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