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렸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천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하략). 1970년, 월간지 사상계 5월호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五賊)이 실렸다. ’판소리 가락의 200자 원고지 40장의 시는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 다섯 도둑 얘기다.
시 ‘오적(반공법 위반)’과 민청학련 사건 배후 조종(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1974년 사형이 선고된 뒤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김지하는 1975년 2년 10개월만에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하지만 1975년 3월 13일 인혁당 사건 연루 혐의로 집행정지가 취소되며 다시 수감, 1980년 형집행정지로 재차 석방, 1984년 사면 복권됐다. 모두 7년간 옥살이를 한 그는 2013년 1월 4일 꼭 39년만에 열린 재심 재판정에서 무죄 판결받았다. 그날 소회를 묻는 질문에 “아무 생각 없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다”고 했다.
오히려 재심 신청 이유를 “보상금 때문”이라면서 국가는 나에게 “5,000억원은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적 사건 때문에 풍자시를 못 써 내가 벌지 못한 돈”이라면서 “(내가 풍자시를 못 쓰니) 나꼼수 같은 엉터리 풍자가 판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에 탄압받다 39년 만에 무죄가 됐지만, 당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를 지지해 차기 정권 중용설까지 나돌았다. 1991년 운동권의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칼럼을 기고해 진보·진영에서는 ‘변절자’라고 비판했다.
5월 8일 향년 81세로 별세한 고 김지하는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본명은 김영일(金英一)로 유신 독재 시대를 밝혔던 촛불이 꺼졌다.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의 사위로도 잘 알려진 그에게 한국 사회는 적지 않은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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