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성(울산 학성) 전투도.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국제무역항 해문(海門)을 품은 땅
역사시대 울산의 출발점이자 심장
신학성, 반구 등 뿌리 재조명 필요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삼척칼을 하늘을 받드니 천하가 부르르 몸서리를 치고, 휘감아 쓸어버리니 불의 피가 산하를 적신다. 지리를 살피고 인문을 통하니 어떤 전쟁도 패배가 없었다. 이순신이다. 올여름 극장가는 한려수도의 시작, 한산섬 앞바다가 출렁거린다. 조일전쟁 초반부의 욱일승천하던 왜의 기를 꺾고 전세의 흐름을 바꾼 대첩은 학익진이라는 바다 위의 성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한산과 학익진(鶴翼陳)은 이순신의 치밀한 해전 대비책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한산은 견내량을 빠져나온 물살이 숨을 고르는 바다다. 바로 그 지점에서 조급증에 심장이 벌렁거리는 와키자카의 조바심을 틀어쥘 절대비책이 학익진이다. 학의 날개로 선단을 펼쳐 바다 위의 성을 쌓는 해상선단 전법이었다. 
 바로 그 절묘한 바다의 형세가 육상에서 펼쳐진 곳이 울산에 있다. 울산여지도가 세 번째로 펼치는 울산의 지리와 인문이다. 바로 학성이다. 왜성이 발아래 포복자세로 고개를 굽힌 자리, 이곳에 400년 전 조명연합군은 야전사령부를 설치했다. 병영성과 울산읍성의 성벽을 허물어 속전속결로 쌓아 올린 왜성에서 결사항전을 선언한 가토의 심장이 한눈에 들어오던 자리였다. 바로 지금의 충의사 자리다. 
 학성은 근대 울산의 뿌리다. 1만 년 전, 영남알프스 자락에서 물길이 흐르고 비옥한 토양이 물산을 잉태할 때 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문명의 뿌리가 선사를 거쳐 삼한과 신라에서 옹골차게 엮인 땅이 학성이다. 삼한일통의 찬란한 영광도 잠시, 혼란의 세기말을 겪던 나말여초에 불세출로 등장한 거상 박윤웅이 황금빛 학의 깃발을 꽂은 곳이 바로 학성이다. 그래서 학성을 두고 근대 울산의 시작이자 역사시대 이후 울산의 오늘을 있게 한 출발점이라 정의한다. 학성의 북쪽은 복산동, 동쪽은 반구동, 서쪽은 중앙동, 남쪽은 태화강과 접한다. 그 언저리를 학성으로 칭한다. 
 학성을 역사시대 이후의 울산 시발점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신라 천년의 무역항과 조일전쟁 전후 핏빛 역사를 되살린 울산인들이 바로 학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의 역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성은 역사시대 이후 울산의 뿌리다. 학성은 울산왜성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지금의 공원에 성이 만들어진 것은 조일전쟁 훨씬 이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엔 이견이 많다. 학성과 계변성, 신학성 등 학성을 둘러싼 옛 성터에 대한 논란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이 가운데 쟁점은 계변성이다. 울산부지도와 울산읍지 등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울산 동헌으로부터 동쪽으로 5리에 계변성이 있다고 표기돼 있는데, 그 위치가 지금의 충의사 뒤편과 일치한다는 주장이 하나다. 다른 주장은 지난 1991년 반구동 강변에 아파트가 들어설 때 발굴된 토성이 계변성이라는 이야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병영성 남쪽에 계변성과 고읍성이 있고, 고읍성은 계변성 서쪽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이를 현재 병영성과 충의사 뒤편 터, 반구동 토성 등에 대입하면 반구동 토성이 계변성이 된다는 이야기다. 계변성이 중요한 것은 이 성을 중심으로 거상이 국제무역을 펼쳤고, 그 위세가 울산은 물론 서라벌의 왕실을 먹여살렸기 때문이다. 결국 계변성이 있는 학성은 삼한일통의 재정적 뒷받침을 한 국제무역상단의 본거지로 8세기 이후 울산과 서라벌을 연결하던 심장이었다. 그 세력이 점차 부를 축적하고 상단무리를 확장해 나말여초 혼란기에 박윤웅 같은 인물을 탄생시킨 셈이다. 
 그런 추론을 펼쳐들고 학성을 바라보면 왜장 가토가 왜성을 쌓은 이유는 명확해진다. 국제무역항인 고대 울산의 지정학적 상황을 볼 때 울산왜성이 있는 곳은 조망권 1급지로 망루나 성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존재했던 성곽을 중심으로 왜장 가토가 왜구의 성곽을 지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너무나 당연하다. 실제로 왜성은 불과 40일 만에 축성을 마무리한 초특급 공사였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왜장 가토는 내륙에서 조명연합군에게 대패한 뒤 울산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바로 학성이다. 기록에 따르면 가토는 울산 장정을 포함한 1만6,000여명을 동원해 밤낮으로 성을 쌓았다. 울산 읍성과 병영성의 성곽이 무너지고 도산에 왜성이 선명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학성은 울산의 오래된 이름이다. 강변의 반구부터 복산과 지금의 학산 일대까지 계변성(戒邊城) 아래에 있던 마을은 신학성 장군이란 별호로 유명한 박윤웅의 세력권이었다. 박윤웅은 부와 무력을 장악한 학성의 거상이었고 집단 이데올로기의 신격화 과정으로 천상의 인물로 미화됐다. 기록에 남은 박윤웅은 영물인 학 한 쌍에서 출발한다. 금빛을 두른 한 쌍의 학이 울고 난뒤 나타난 박윤웅을 백성들은 신학(神鶴)으로 불렀는데 그가 학성에 자리하자 물산이 풍성하고 평화로운 날이 계속됐다는 이야기다. 계변천신이 학을 타고 내려와서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장악한 뒤 그 이름을 신학성 또는 학성이라 했다는 기록이다. 울산의 별호가 학성이 된 이유도 여기서부터다.
 학성에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지척의 반구동 일대다. 신라의 해문(海門)인 반구동은 지난 1991년 한 대학박물관이 조사한 뒤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울산에는 8세기 무렵부터 3개의 항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난 '율포(栗浦)'와 인도 어디쯤에서 황금을 실은 배가 도착했다는 '사포(絲浦)', 그리고 국제무역항의 외항이었던 '개운포(開雲浦)'다. 이 가운데 사포가 반구동 항만유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포는 신라 왕경인 서라벌까지 지척이었고 평지로 일직선 도로가 연결돼 물류 이동이 편리했다. 바로 그 국제무역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박윤웅은 학성을 성지로 세력을 키웠고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오늘의 울산을 그려냈다. 
 마지막 팁 하나. 학성산과 학성공원이 위치한 자리는 학의 날개가 펼쳐진 형상. 그곳에 무겁고 웅장한 건물이 짓눌려 구시가지가 웅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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