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섭 울산시의회 행정자치위원장

적자생존, 생명체 보존하는데 필요능력
진화역사서  살아남은 호혜적 존재 인간
적자란 강하고 냉혹한 것 아닌 ‘친화력’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배틀 그라운드' 그리고 '배틀 로얄'까지 세가지 콘텐츠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경쟁'과 '공정'이다. 이들 콘텐츠 모두 극단적 적자생존을 추구하는 극한의 경쟁 공간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경쟁을 시킨다. 
 단, 그 공간에 처음 입장할 땐 누구도 지닌 것이 없기 때문에 기회의 평등을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혹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차이가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곳이라고 여기고 이런 식의 기회의 평등에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차이를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노력의 대가인 '능력'으로 차등을 두자는 논리가 현재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극단적 적자생존 구조를 옹호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회학자 오찬호의 말처럼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사람마다 동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의 게임장에 들어설 때 모두가 빈손으로 그곳에 입장했을지라도 그들이 지닌 타고난 신체 능력, 지능, 나이, 건강, 성별, 국적, 이전의 경험 등 이미 너무도 많은 요소에 차등이 존재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콘텐츠들이 흥행하며 우리의 시대정신과 맞물려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씁쓸하다. 
 극단적 적자생존을 목표로 하는 한국형 서바이벌 콘텐츠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흥행하는 현상이 한편으로 고무적일 수 있으나 해당 콘텐츠들이 대변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공정하거나 정의롭다고 평가하긴 어려울 것이다. 
 '오징어 게임'을 만든 감독은 항상 경쟁에 치여 높은 곳만 바라보는 현대 사회를 표현하고 싶어서 참가자들의 숙소는 콜로세움으로, 이동하는 통로는 개미굴처럼 표현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게임에 패배해 죽은 참가자들의 시신을 소각하는 곳은 아우슈비츠를 참고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이 되길 바라는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소수만 살아남는 무한 경쟁 사회, 피라미드 구조, 폭력과 혐오가 난무하고 능력주의적 공정이 지배하는 세상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이를 소재로 하는 콘텐츠들을 단순히 '재미'로만 소비할 일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적자생존 능력이 없는 생명체는 지구에서 사라지고 멸종된다고 배웠다. 적자생존은 과거나 현재 또 미래까지 생명체를 보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자연 선택과 적자생존의 법칙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와 신념이 되었다. 
 삶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자신을 채찍질하며 우리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원리를 당연시했기 때문이다. 
 그 원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다윈의 표현처럼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오로지 주변 모두를 제압하고 최적자가 돼야 할까? 
 의외로 진화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종 가운데 가장 다정하고 협력적인 종이 바로 인간이라고 한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끝까지 생존한 까닭은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살아남은 존재가 '강자'가 아니라 '호혜적 존재'라는 점이다. 
 적자생존에서 '적자'는 강하고 냉혹한 것이 아니라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에 의한 친화력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한 진화인류학자의 책 속 한 문장처럼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라는 경구가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종섭 울산시의회 행정자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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