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름 더 클래식 이음 대표·본지 독자권익위원

눈물조차 흘릴 수 없던 ‘첼리스트 재클린’
우아하고 불꽃같던 일생 음악으로 남겨져
그녀의 깊은 탄식 첼로선율로 위로 받기를

 

 

  요절한 영국 출신의 천재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1945~1987)의 묘지명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사랑했던 아내 : Beloved Wife of Daniel Barenboim"라고 말이다.
 그들이 어떤 사랑을 했을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사랑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녀의 사랑에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뺨 위로 하염없이 흘렸을 눈물이. 
 온몸이 굳어버리다 심장까지 굳어버리게 되는 불치병에 걸려 죽기 직전 눈물조차 흘릴 수도 없었던 재클린의 그 눈물이 보인다.
 영국의 백장미라 불리던 영국 출신의 천재 첼리스트 재클린의 인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재클린은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4살 때 첼로를 처음 접한 이후로 10대에 이미 수많은 거장들이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고 그녀는 20세에 이미 세계적인 스타 뮤지션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랑받다 그녀가 23세에 돌연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세계적인 거장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1942~) 이었다.
 그 당시 바렌보임은 유망한 지휘자였지만 그의 명성은 재클린만큼은 아니었다.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과 그들의 만남을 견주며 많은 이들은 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그들은 결혼했다. 
 하지만 재클린의 행복은 너무나도 짧았다. 결혼 후 무대에서 실수하는 일이 많아지자 그의 남편은 그녀를 비난했고 재클린은 점점 우울해져만 같다. 
 그런 그녀의 증상은 더더욱 심해졌고 결국 그녀는 다발성 경화증이란 희귀 불치병이란 진단을 받은 이후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나태해져서가 아니란 것을 남편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던 재클린은 대체 얼마큼 그를 사랑했던 것일까? 
 결국 28세에 그녀는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후로 그녀의 인생은 더욱 비참해졌다. 
 바렌보임은 그녀를 떠나 다른 여인과 살며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었고 재클린은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바렌보임은 단 한 번도 그녀의 묘지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 짧은 활동 기간 중 재클린은 수많은 명반을 남겼다. 그리고 영국 출신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1857-1953)의 잊혀진 첼로 협주곡을 연주해 세상에 알렸다. 
 엘가의 이 곡은 초연에 실패하고 잊혀졌지만 재클린의 연주로 재평가되며 그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첼로 작품이다.
 그녀가 첼로를 무대에서 연주했던 기간 13년 그중 전성기 6년 그리고 투병한 기간 14년. 그녀의 삶이 숫자로 보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 그녀에게 헌정한 곡이 바로 <재클린의 눈물>이란 작품이다. 이 곡은 오펜바흐:Jaques Offenbach(1819-1880)의 발표되지 않았던 작품 중 한 곡을 사후 100년이 지나 독일의 첼리스트 토마스 베르너:Thomas-Mifune, Werner 가 발견하게 되면서 <재클린의 눈물>이라고 명명하게 된다.
 재클린의 남겨진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가 움직이지 못해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도 그녀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녀의 미소가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도 보인다.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내가 더 이상 첼로를 하지 않으면 어때?" 남자가 대답한다. "그럼 그건 더 이상 재클린이 아니지." 
 여름이 지나갔다. 기분 좋은 바람이 내 뺨을 살짝 만진다. 가을이다. 가슴 아픈 사랑이 떠오르기도, 새로운 사랑에 설레기도,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기도 하는 모든 일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런 가을이다.

서아름 더 클래식 이음 대표·본지 독자권익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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