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출신 독립운동가 후손이 그동안 논란이 돼 왔던 울산출신 영문학자, 정인섭 선생의 친일행각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의 증손 박중훈씨(사진)는 부산경남사학회가 최근 발간한 학술논문집 제89호를 통해 “울산출신, 정인섭의 친일행각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1943년 이후 보이는 일제의 강압적인 친일과는 다른 자발적인 참여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씨는 논문을 통해 “정인섭의 친일활동 저변에는 유학시절에 발간한 「온돌야화」의 서문과 1936년 8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4차 세계언어학자대회 참석을 전후로 나타난 일제에 우호적인 언동들이 쌓여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지금까지 그의 주요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어학회에서의 한글연구 활동과 그에 상반된 한글 말살 활동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발적으로 참여한 활동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씨는 정인섭이 1927년 1월 3일에 쓴 온돌야화 서문의 ‘올해부터 제2기 르네상스 시대’라는 표현은 1926년 12월 23일 다이쇼(大正) 천황이 사망하고 아들 히로히토(裕仁)가 천황으로 등극한 사건을 가리키는데 식민지 지배라는 암울한 현실은 물론 그 전해에 일어난 6·10 만세운동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음에도 새 천황 쇼와(昭和)는 물론이고 다이쇼 천황까지를 찬양한 표현에서 일제를 향한 단순한 우호적인 시선, 그 이상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1936년 8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4차 국제언어학자대회에 참석 후 일본의 후원으로 이뤄진 서구, 중동, 동남아로의 여행경험으로 일제의 황도주의 문학이론 정립과 서양문화의 비하를 주로 쓰게 되어 일제의 의도대로 움직였다는 것.

그동안 정인섭은 연희전문 교수로서 문학과 학문 활동에 머물고 있었으나 1936년 ‘국제언어학자대회’ 참석 이후 아일랜드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10년 전 친일언론인, 최린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박 씨는 정인섭의 친일은 1939년부터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 1936년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독재 권력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조선에는 파시즘문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강변했던 것을 주시해야하며, 1938년 삼천리 10월호에 연재된 기행문 「愛蘭紀行, 太西洋건너 故國으로」에서 식민통치의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저항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또 ‘문예보국강연회’에서 제2반 호남선에 속했음에도 제1반 경부선에도 합류해 모든 일정을 함께하는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던 것 만 봐도 마지못해 참여한 친일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적극 참여했던 친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중훈씨는 “단순한 친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여러 방면에서 여러 해 동안 자발적인 활동을 반복했다”며 “그는 영문학자이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한글을 더 사랑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황국신민·일선 동조·천황 제일주의’도 모자라 한글을 버리고 일어로 창작하는 일을 문단혁신이라 일컫고, 그 실행과 이론개발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덧붙여 박씨는 “해방 후 1983년 사망할 때까지 보인 그의 활동은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일제강점기 활동을 바탕으로 이룬 성과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며 “일제강점기 때 자신의 글과 활동을 숨기기만 했을 뿐 그가 쓴 글 어디에도 한 마디 후회나 잘못이라는 사죄를 남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편 정인섭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동원인섭(東原寅燮)으로 창씨개명, 일제 말기에 조선총독부 산하 어용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 및 간사, 친일 글로 분류되는 11편의 글, 태평양 전쟁의 지원을 위한 순회강연 참가 등이 알려져 있다.

1948년 민족정경문화연구소가 엮고 삼성문화사에서 발간한 ‘친일파 군상’에는 정인섭을 ‘피동적으로 끌려서 활동한 자’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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