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학생·교사 6명, 일반인 3명 무사인양 기원 

 

(노컷뉴스 자료사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1073일 만인 지난 23일, 본격적으로 세월호 인양작업이 시작됐다. 애타는 마음으로 지난 3년여 동안 참사 현장을 지켰던 미수습자 9명의 가족들은 무사 인양과 온전한 수습을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 세월에 찢긴 세월호…엄마 가슴도 찢겨

23일 오후 세월호 침몰 해역인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 앞바다에서 중국 인양업체인 상하이셀비지의 잭킹바지선 두척이 세월호 인양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지난 23일 새벽, 바지선에서 인양작업을 지켜보던 이금희 씨는 올라오는 배를 보고 대성통곡했다. 딸 조은화(단원고 2학년 1반) 양이 차가운 쇳덩이 속에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이다.

은화 양은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우등생이었다. 특히 수학에 자신 있어 회계공무원을 꿈꿨다.

엄마와는 둘도 없는 말벗이었다. 한순간도 떨어져있기 싫어 등굣길에도 엄마에게 문자로 '현재위치'를 알렸다. 엄마가 시큰둥한 날이면 하굣길에 간식거리를 사들고 돌아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거수일투족을 얘기하는 살가운 딸이기도 했다.

 


인양현장을 바라보며 이 씨 옆에서 함께 대성통곡하던 박은미 씨에게도 싹싹한 딸이 하나 있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꿈이었던 허다윤(단원고 2학년 2반) 양은 수업이 끝나면 항상 엄마에게 '마중 나와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춤과 노래를 좋아해 항상 밝은 아이였다.

하지만 3년 전 아빠의 검정 모자를 들고 수학여행 길에 오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됐다. 딸의 문자는 없었지만 엄마는 오늘도 바다 위에서 딸을 기다리고 있다.

박영인(단원고 2학년 6반) 군은 또래 사춘기 친구들과 달리 집안일도 척척 해내는 딸 같은 아들이었다. 주말에 부모님이 여행을 가면 항상 따라나섰다.

영인 군은 축구를 좋아해 체대 진학을 꿈꿨다. 그래서 엄마는 사고 전 축구화를 사달라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게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사고 이후 엄마는 팽목항에 새 축구화를 가져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영인 군과 같은 반 친구였던 남현철 군은 친구의 자작곡을 직접 작사했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기타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외모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사진이 실물보다 크게 나오거나 머리가 헝클어져있으면 엄마에게 툴툴대기도 했다. 엄마는 지난해 아들이 투덜거렸던 사진을 노란 피켓에 담아 광화문광장에서 공식인양 발표를 촉구하는 1인시위를 했다.

◇ 끝까지 아이들을 놓지 않으려던 선생님
 

세월호 침몰 해역인 전남 진도 동거차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좌측 램프 제거 작업이 24일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수부는 이날 오전 6시45분 세월호 선미 램프 제거 작업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고창석 교사는 인명구조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로 수영을 잘했다. 사고 당일에도 마지막까지 학생들을 탈출시키느라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 교사는 아내를 살뜰하게 챙기기로도 유명했다. 아내는 단원고 바로 옆에 있는 단원중 교사였다. 고 교사는 아내가 아침밥을 먹지 않고 출근하면 학교 사이 담장 너머로 간식거리를 챙겨주곤 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당일 아침, 남편은 '애들을 돌보느라 고생했다. 미안하다'는 문자 메시지를 끝으로 영영 아내 곁을 떠났다.

양승진 교사 역시 학창시절 씨름과 유도를 했을 정도로 풍채가 좋아 학생들에게 듬직한 선생님으로 통했다.

또, 학생들보다 먼저 등교해 학교 앞 교통을 정리하면서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지던 선생님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에도 선체가 기울자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주고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 16년 만에 한집서 살려다 화 입기도…
 

세월호 침몰 해역인 전남 진도 동거차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좌측 램프 제거 작업이 24일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수부는 이날 오전 6시45분 세월호 선미 램프 제거 작업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권재근 씨와 아들 혁규 군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아내와 딸과 같이 귀농하던 길에 변을 당했다. 가족 중엔 딸만 유일하게 생존했다. 오빠 혁규 군이 입혀준 구명조끼 덕분이었다.

권 씨 가족은 매우 화목했다. 부부는 힘겨운 노동일을 하면서도 베트남 친정에 큰 집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부자지간에도 유난히 정이 깊어 어디를 가든 꼭 안고 다녔다고 한다.

이영숙 씨는 16년간 떨어져 지낸 아들과 제주도에서 같이 살기 위해 세월호에 올랐다. 생계 때문에 아들과 떨어져 지낸 기간이 많았다.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 등지에서 붕어빵을 팔고 식당일도 닥치는 대로 했다. 이 씨는 부지런하고 항상 웃는 모습이라 직원과 고객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렇게 돈을 모아 서귀포에 방 두 개짜리 집을 얻었고, 1년 뒤 제주도로 발령받아 올 아들과 같이 산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가라앉고 말았다.

C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금희 씨 미수습자 9명의 이름을 모두 불렀다. 다음은 이 씨의 말이다.

"현철이, 고창석 선생님, 양승진 선생님, 영인이, 다윤이, 은화, 권재근 님, 7살짜리 혁규, 이영숙 님 찾아주시고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함께해 주신 분들의 마음이 모일 때 세월호가 올라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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