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우
울산대 교수·디지털콘텐츠디자인학과

꽤 오랜 기간 학생들에게 디자이너의 큰 자질 중 하나가 배려라고 강조하곤 했다. 왜냐하면, 필자 역시 디자이너 출신이고 지금도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SNS의 한 게시글을 보고 그 배려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 그 게시글이 한 뉴스매체에 실리게 돼 부분적으로 옮겨본다.

// 며칠 전 함께 밥을 먹던 지인이 내 앞에서 울화통을 터트렸다. 모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지하철 임산부 좌석에 임신하지 않은 여성들이 자꾸 앉으니 임신 여부를 어떻게든 확인할 수 있는 여성에게만 임산부 배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는데, 지인이 거기에 댓글로 문제를 제기하자 커뮤니티에서 단칼에 차단당했다는 것이다. 뭐 그런 커뮤니티가 다 있느냐는 생각에 씁쓸하게 밥을 씹고 있는데 지인이 말했다.
“배지. 그거 임산부가 달 게 아니라 우리가 달면 안 되나? ‘나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겠습니다’라고 적힌 배지를 우리 같이 임신 안 한 사람들이 달고 있으면 되잖아.”
나는 밥 먹다가 귀가 번쩍 뜨여 지인에게 좀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고 채근했다. 지인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임산부들 입장에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양보해 달라고 말하기가 굉장히 부담스러워. (중략) 차라리 언제든 자리를 양보해 주겠다는 배지를 우리 같은 사람들이 달고 앉아 있으면 임산부들이 안심하고 우리한테 오지 않을까? 괜히 헤매거나 힘들게 서서 가지 말고 우리한테 오라 이거야.”
(“나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겠습니다” 최지혜· 『슬로우뉴스』 2017.3.15) //

위 에피소드는 몰상식한 사람들에게 느끼던 분노에서 시작된 일이 이렇게 따뜻한 배려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다. 뿐만아니라 ‘임산부 자리 양보 배지’를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사회가 눈치채지 못한 부분을 위해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진지하게 접근하는 분들이 계셔서 미래가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가진 크고 작은 다양한 힘이 있다.

권력(權力), 재력(財力), 학력(學歷), 체력(體力), 심지어 매력(魅力)도 힘의 일종이며 거기서 발생하는 격차가 강자와 약자를 만들어낸다. 이는 서로가 평등하거나 같은 자리에서 대화를 나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강자의 본질을 엿볼 수가 있다. 내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실은 자신의 인격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강자가 나누는 것은 단지 금전과 식량 같은 물질적인 것도 있겠지만, 약자를 대하는 태도, 즉 기본적인 배려심이다. 반대로 약자는 받아도 된다. 힘들 때 받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지 말자. 강자가 주는 것은 내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작은 부분이다. 혹시 죄의식이나 수치심이 생긴다면 차후 자신보다 약자에게 나눠주도록 하자.

수치심이란 자신을 부끄러워 느끼는 마음이다. 자아와 자존심의 연장에 있는 개념으로, 수치가 되는 행동을 할 경우 느끼는 것이다. 이는 사회 규범에 적응 같은 행동을 촉구하지만, 반면에 지나치게 느낄 경우에는 행동의 위축 등 문제를 낳는다. 또 본인이 수치가 되는 행동을 했다는 자각이 없으면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기준이 바로 수치심의 유무(有無)다. 유년기에는 수치심이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자라 청소년기에는 의도하지 않은 실수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으려 하고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은 의도적인 과실뿐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실수나 무례한 언행을 했을 경우에도 수치심을 느껴 사과하거나 급히 자리를 피하게 된다. 

반대로 생물학적으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계획적으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며 이용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수치심은커녕 오히려 성취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왜 그들은 남들을 속이고 이용하며 성취감을 얻을까 하고 의아해하지만 그런 언행으로 인해 금전 또는 시간적 여유를 취득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것을 거저 얻으며 강자가 됐다는 일종의 착시(錯視)가 발생한다. 자신의 노력과 투자 없이 결과를 내는 것을 한 두 번 경험하며 조금씩 그 착시에 중독(中毒)되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타인의 배려하는 마음이나 모습을 보며 가식(假飾)이라 조소(嘲笑)하기도 한다.
조금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면 최근에는 제대로 된 신사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어른이 그다지 없다.

그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요즘 애들은’ 사실 ‘요즘 어른들’과도 별반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다.
한껏 배려는 못하더라도 어른이라면 적어도 수치심은 알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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