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반핵 운동은 1987년 민주화운동과 합류하면서 불이 붙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길다는대만의 계엄령(1949년 5월20일~1987년 7월15일)이 막 해제된 때였다. 즉, 지난해 선거에서 당선된 차이잉원 총통이 ‘2025년 원전제로’를 선언하기까지 적어도 30년 동안 탈원전을 둘러싼 사회적 공론화가 사회·정치·문화 곳곳에서 진행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탈원전 반핵 정책을 둘러싼 찬반 갈등은 여전한 분위기다. 국민당과 민진당은 정권교체를 반복하는 내내 롱먼 원전 건설의 중단과 재개 문제를 놓고 싸웠고, 이를 지켜봐 온 국민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을 불신하고 있다. 롱먼 원전이 소재한 신베이시(新北市) 공랴오취(貢寮區) 해안을 찾아가 주민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탈원전을 둘러싼 공론화에 첫 걸음을 뗀 한국이 반면교사 삼아야 할 민심이 그 곳에 있었다. 지난 30년간 반핵 운동의 선두에 섰던 홍선한 녹색공민행동연맹 사무처장과 반핵운동가인 류화젠 대만대학 사회학부 부교수도 만나 대만의 탈원전 여정을 들어봤다. 우여곡절 끝에 집권 여당인 민진당의 첸만리 위원과 짧은 서면인터뷰도 진행했다. 
    

  공정률 98%서 중단 롱먼원전
  직원 400여명이 유지관리만
  인근 옌랴오 해수욕장 재개장

“1988년 전력합리사용 설명회
  값비싼 가전 사은품 줘 귀막고
  원전 주민 100% 동의 보도
  환경단체 찾아가 유해성 알고
  2,000명이 반핵자구회 활동
  바뀐 정권도 주민과 소통안해
  정부·정치인들 믿을 수 없어”

 

지난 4월 롱먼 건설 도로 맞은편에 해수욕장이 개장했다. 롱먼 원전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해수욕장을 개장했다고 한다.(작은 사진은 해수욕장 확대 모습)

◆ 건설중단된 원전 맞은편엔 해수욕장 개장

롱먼 원전이 소재한 신베이시(新北市) 공랴오취(貢寮區) 해안은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기차로 5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부롱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10분쯤 달렸을까. 이 곳이 고향이라는 백발의 운전기사가 “저기가 롱먼 원전”이라고 했다. 

돔 형태의 한국 원전과 달리, 미리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원전인지도 모르고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사각 건물 2개가 대로변에 나란히 서있었다. 

도로 바로 건너편에는 지난 4월 개장한 옌랴오(鹽寮) 해수욕장이 영업 중이었다. 평일엔 50여명, 주말에는 100~200여명의 해수욕객이 이 곳을 찾는단다. 롱먼 원전이 정상가동 됐다면 해수욕장이 개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만전력청 직원이 롱먼 원전 견학 정문 앞에서 취재진을 맞고 있다.

롱먼 원전 정문에 도착하니 경비직원 말고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어 을씨년스러웠다. 

현지 섭외 코디네이터를 통해 사전에 대만전력청에 원전 시설 견학을 신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몇일 전 일본 취재진도 정문에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정문에서 취재진을 맞은 대만전력청 홍보팀 직원은 “롱먼 원전 1호기는 공정률 98%에서 건설이 중단돼 봉인(sealed)됐고, 공사 진척이 미미한 2호기도 건설이 중단됐다”면서 “400여명의 직원이 상주하면서 시설과 건물을 유지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택시 기사에게 ‘마을 사람들은 롱먼 원전에 대해 어떤 의견이냐’고 물으니 옌랴오(鹽寮)반핵자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원전 건설 반대 운동을 벌여온 동네사람을 소개해주겠다며 취재진을 안내했다.

◆옌랴오(鹽寮)반핵자구회 주민 오문통(吳文通)씨 인터뷰 

낡고 오래된 마을이었다. 가난해보였고, 조용했다.  
택시기사가 상가건물로 들어가더니 이내 취재진을 향해 와보라고 손짓했다. 아내의 고향인 이 곳에서 작은 전파사(集宇有限公司)를 운영 중인 오문통(吳文通·63)씨가 취재진을 맞아줬다.
 

30년째 롱먼 원전 건설 반대 운동을 펼쳐온 옌랴오(鹽寮)반핵자구회 주민 오문통 씨.

   

-롱먼 원전 건설을 반대했다고 들었다. 왜 반대한건가?

▷처음부터 반대한 건 아니었다. 원전을 몰랐기 때문이다. 실제 원래 우리 주민들은 원전을 유치하려고 했다. 대만 신베이시에 있는 제1호 원전은 1978년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했는데, 원래 제1호 원전의 건설예정부지가 여기 옌랴오였다. 제1호 원전은 대만 10대 건설 사업 중 하나였고, 타도시와 유치경쟁을 벌이다 빼앗겼다. 

그러던 1988년 3월 1일, 대만전력청이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설명회를 열었다. 롱먼 원전 건설을 위한 ‘전력합리사용’ 설명회였다. 하지만 우리는 설명회 내용이 뭔지 관심이 없었다. 당시 대만전력청이 TV와 냉장고 같은 값비싼 가전제품을 사은품으로 내걸고 오락프로그램을 진행했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그 사은품을 타냐, 못타냐 였지 전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날 신문에 우리 마을주민들이 롱먼 원전 건설에 100% 동의했다는 보도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 신문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알게 됐다. ‘이놈’들이 설명회를 한다면서 고가의 사은품을 들고와서 우리의 귀를 막아놓은 게 아닌가.  

-그럼 반핵운동은 언제 시작했나? 

▷신문 보도가 난 다음날, 타이베이 시내에 나가 환경호보단체를 찾아갔다. 마을주민의 70~80%가 어민인데, 원전이 들어서면 당장의 생계도 문제가 되는거 아닌가. 환경보호단체에 원전이 뭔지, 뭐가 어떻게 유해하다는 건지, 우리가 뭘 해야하는 건지를 물어봤다.  

그리고 3월6일에 ‘옌랴오반핵자구회’를 꾸려 원전 건설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때 옌랴오 인구로 등록된 게 1만2,000명이고, 실제 거주하는 주민은 5,000명쯤 됐는데, 그 중 2,000명이   옌랴오반핵자구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86년에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원전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도 꽤 있었지만 계엄시대라 집회를 하지는 못했고, 그냥 불만을 얘기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듬해 계엄령이 40여년 만에 해제되면서 집회가 가능해졌고, 롱먼 원전 건설을 위한 대만전력청의 설명회가 88년에 이뤄졌기 때문에 우리는 반핵운동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유치할 뻔 했던 제1호 원전 지역주민들을 찾아가 ‘원전이 있으니 어떠냐’고 물어도 봤다. 그들은 ‘정부는 지역경제가 발전될거라고 했지만 10년 공사기간동안 일자리가 늘어났을 뿐’이라고 말해줬다. 건설인력도 거의 외부에서 왔고, 공사가 끝나니 다 빠져나가더라는 얘기였다. 원전 주변 지역주민들의 암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사실도 대만대학 교수로부터 들어 알게됐다.  

우리가 일어서지 않으면 마을이 다른 원전 지역처럼 될꺼라는 걱정에 지난 30여년 간 반핵 투쟁을 하게됐다.  

-원전을 짓는 대신 마을주민들에게 지급된 인센티브는 없었나

▷원전을 짓는 대가로 정부에 뭐가를 바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우리가 원전 건설을 계속 반대하자 건설비용의 1,000분의 1을 공랴오 동사무소에 공탁해놓을테니 지방건설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환원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전기요금 감면과 학교급식비 지원도 약속했다. 

우리는 정부가 준 지방건설비용의 경우 특정사람들, 그러니까 원전 건설을 위해 꼭 동의를 받아야 하는 소수층의 로비자금으로 쓰여진게 아닌가 의심한다. 실제 주민들은 그 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주민들의 요구대로 롱먼 원전은 공정률 98%에서 건설이 중단됐다. 반핵운동은 대성공 아닌가?

▷우리가 원하는 건 롱먼 원전의 ‘영구폐쇄’다. 하지만 정부는 2025년 원전제로를 선언하면서도 롱먼 원전의 영구폐쇄는 선언하지 않고 있다. ‘기다려달라’고만 한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정부는 주민들과 소통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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