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처용탈, 일제시대 일본인이 만든 형태 따라
조선시대 악학궤범·의궤 내용과 맞지 않는 부분 많아
처용탈·처용무 제대로 전승·보전할 사람 많아졌으면

 

김현우 처용탈 제작자

조선 9대 성종임금 때 성현이 쓴 악학궤범 9권에 처용의 얼굴 그림과 처용탈을 만드는 방법이 기록돼 있다.

“사모는 대(竹)로 망을 떠서 만든다. 여느 제도와 같이 종이를 바르고 채색하고 꽃을 그린다. 가면은 피나무를 깎아서 만들고(以假木刻造), 옻칠한 베로 껍데기를 만들고 채색하며, 양쪽 귀 위에는 납구슬 달린 주석 귀고리를 단다. 사모 위에 꽂는 모란꽃과 복숭아 나무 가지는 고운 모시베로 만들고, 복숭아 열매는 나무를 갈아서 만든다.”

처용탈의 기원은 신라 49대 헌강왕 때 울산 개운포에서 헌강왕을 만난 처용설화에서 시작되며, 처용무는 고려 때는 두 사람이 흑포 사모, 검은 모자와 검은 도포를 입고 추었고, 조선 세종임금 때 오방처용무로 바뀌어 청·홍·황·흑·백의 옷을 입고 동·서·남·북 중앙의 방위에서 처용무를 추는 의식무로 바뀌어 전해온다. 처용탈은 조선 중기와 후기로 내려오면서 턱이 얼굴 길이만큼 점점 길어지는데, 조선시대에 처용무를 추는 그림인 여러 점의 의궤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방처용무로 추던 처용무가 일제 강점기에 중단됐고 처용탈 역시 만들어지지 않았다. 1930년 순종황제 탄신 50주년 기념행사 때 기록에는 궁중의 미술공장에서 처용탈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순종황제 탄신 기념행사에서 어린 나이에 직접 무동춤을 춘 고 김천흥 선생은 생전에 국립국악원에서 필자에게 “그건 왜놈들이 만든 것”이라고 확인해 줬다. 

결국 조선시대의 전승된 탈이 아니고 왜색이 짙은 처용탈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재 국립국악원의 처용탈은 당시에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이어 오고 있는데 나무로 조각한 것이 아니라 석고틀 위에 문종이를 겹겹이 발라서 만들고 있는데 이는 악학궤범의 처용 얼굴 그림과도 맞지 않으며, 그렇다고 조선시대에 턱이 길어진 의궤도의 그림과도 맞지 않는 탈이 된 것이다. 

현재 필자가 만드는 처용탈은 32년 전인 작업 초기에는 국립국악원의 탈을 본떠서 만들었으나 그 후 악학궤범의 그림을 보고 이는 맞지 않다고 판단돼 독자적으로 기록에 맞는 처용탈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피나무를 깎아서 만들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소나무, 벗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들로 작업한다. 피나무는 중부 이북 지방에서 자생하므로 필자가 작업하는 울산지방에선 구하기가 쉽지 않아 구하기 쉬운 나무로 작업 해 보니 오히려 나무는 피나무보다 단단하지만 만든 후의 무게는 차이도 나지 않고 작업 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필자는 나무탈만 고집하지 않고 악학궤범 기록에 나와 있는 삼베 천으로도 처용탈을 만드는데 삼베 두 겹, 모시 두 겹 그리고 중간에 마분지를 넣어 견고한 탈을 만들고 칠은 옻칠로 마무리 하고 벼슬을 한 사람이 쓰는 모자인 사모 역시 삼베와 모시 천으로 작업한다. 

필자는 공방을 차려 놓고 반평생을 처용탈을 작업하는데 아직도 모자라는 부분이 있으면 스스로 고쳐가면서 작업한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방마다 독특한 탈놀이들이 전승되고 있다. 처용탈은 울산을 대표하는, 천년이 넘도록 이어져온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제대로 만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처용무를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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