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대립 벗어나 일년을 마감하는 십이월
허심탄회 ‘소통’으로 인간관계 오해 풀어야
‘도광양회’의 자세로 신성한 새해 맞이하자

이병근 시인·문화평론가

자갈처럼 이리저리 구르고 부딪치며 정신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들어내지 못했던 회향(回鄕)의 본능이 살아나는 계절, 섣달은 사람들에게 골목 같이 그윽한 둥지이다. 그래서 ‘고향’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서 상대성으로 겪어야했던 잗단 갈등과 대립에서 벗어나 서로 어루만지며 사랑하고 비로소 자존을 갈무리하는 한해의 끄트머리에서 해맞이를 한다.
못다 한 것들 때문에 아쉬움도 있고 자신을 관찰해 반성하는 일도 있어,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려는 자세가 오히려 아름다워 관용이 통하는 십이월에는 성화(종교화)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런 성화들 중에 렘브란트의 작품 중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돌아온 탕자’를 들 수 있겠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까지 그리던 작품으로, 끝내 미완성인 채 마지막 작품 일 것이다.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요구하는 것은 곧 아버지가 어서 죽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그런 무례한 아들에게 아무 말 없이 재산을 주었고 아들은 집을 떠나 재산을 다 탕진하고 갈 곳이 없어진 후에서야 돌아갈 곳이 없는 탕아는 아버지의 품이 진정한 보금자리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돌아 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혼내기는커녕 거지꼴을 한 아들의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며 두 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쓰다듬어 준다. 그리고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아들을 위해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신약 ‘눅15장11~25’) 그림속의 아버지는 종교적 ‘아버지’의 상징으로써 아들의 어깨 위에 올려 진 두 손에서 용서와 관용이 잘 표현되고 있다.

‘돌아온 탕자’의 주제는 회개와 용서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 화가 자신의 가장 처절한 자화상에 속한다. 실제 렘브란트는 화려했던 삶과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모두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재산까지 탕진한 후 비참한 생활로 홀로 고독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회환의 눈물로 자신의 막후를 화폭에 남긴 것이다.
불경 중에 법화경‘ 제4품 신해품(信解品)에도 기독교 성서의 ‘돌아온 탕자’와 유사한 ‘장자(長者)와 궁자(窮子)’의 이야기가 있다. 두 이야기는 종교철학적 깨달음의 여정은 덧없는 속세에서 정욕(情欲)으로 방황을 하다가 마침내 떠나온 곳으로 돌아온다는 ‘귀의’의 의미다. 무겁고 짐 진 자들이 머무르고 싶은 십이월은 참회와 관용의 이부자리가 깔려있는 고향집 사랑채 같이 ‘안식의 골목’인 것이다.

체감이 될 수밖에 없는 일 년을 마감하는 십이월은 모든 분야에서 투명한 결산과 청산으로 셈을 분명히 해야 하며, 인과관계에서도 옳고 그릇됨을 오해 없도록 허심탄회한 소통으로 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묵고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자는 소망을 가지고 즐거운 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 회식을 하게 된다. 직장은 업무의 연장선에서, 각종 모임은 사회적 통념상의 기준으로, 가족은 더 풍성한 행복을 위해 회식이 필요하다.

인간은 동물적 욕구의 일환으로 먹고 마시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며 즐긴다. 그리고 그 즐거운 행위의 의미를 서로 ‘민낯’을 가까이 한다는 만족과 긍정으로 경계를 풀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이다. 회식의 필요성과 그 실행의 규모와 방법에 있어 사람들의 견해 차이는 있겠으나, 회식을 통해 얻어지는 새로운 친목과 단합의 힘은 미래지향적 에너지로 발동한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운주당(運籌堂)이라는 기획실을 만들어 놓고 밤낮으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투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면서 부하들과 술을 자주 마셨다고 한다. 특히 포상과 사기진작을 위한 회식(1592년부터 1598년까지 123회 이상)을 자주 열었는데 그는 밤새 술을 마셔도 닭이 울면 반드시 촛불을 켜고 문서를 보거나 전술을 강론했다고 한다. 회식에는 술이 있기 마련이다. 회식(會食)은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섣달 회식은 신성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푸닥거리기도 하다. 후회도 했다, 용서도 했다. 아니, 용서도 받았다 이제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자세로 진정한 군자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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