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길시인·울산 민예총 감사

일제강점기 광범위한 조사·연구 등 근대민속학 기틀 세워
한국 민속 문화 보존·유지 ‘문화적 독립운동가’ 기념해야
상북면 고향 마을에 기념관 세워 민속공연·관광 연계를

울주군 상북면 양등마을은 민속학자 석남 송석하(1904~1948)의 출생지이다. 마을회관 근처에 송석하 관련 안내판이 있었지만 낡아 철거되었다. 그 이후 그를 소개하는 곳이 울산에는 없다. 송석하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송석하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민속에 대한 광범위한 현지 조사와 연구, 민속 문화의 보존과 보급, 학술단체 조직 등을 통해 한국 근대 민속학의 기틀을 세웠다. 해방 후에는 인류학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송석하는 언양초를 다니다 울산초를 졸업하고, 부산상고를 다닌 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을 중퇴했다. 1927년 언양 출신인 정인섭이 『온돌야화』를 일본에서 출판할 때 울산지역의 설화를 채집해 제공했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민속자료를 수집하고 잡지와 신문에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32년 조선민속학회를 창립하고 『조선민속』 잡지를 창간・발행하였다. 또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할 때 정인섭, 최현배와 함께 송석하가 참여하였다. 그는 봉산탈춤을 중계방송하고, 동영상을 촬영하고, 외국에도 조선 민속을 알렸다. 해방 후 ‘연극동맹결성대회’ 위원장으로 언양 출신 극작가 신고송과 함께 일제 잔재 청산과 진보적 조선연극 수립 활동 등을 하였다. 또 ‘조선산악회’를 창립하여 회장으로 울릉도・독도, 한라산, 태백산 등을 현지 답사하여 학술조사 하였다. 자신이 수집한 민속자료를 토대로 ‘국립민족박물관’을 설립하고, 서울대학교에 인류학과를 만들었다. 1947년 언양 반곡초에 부지 1,271평을 기부하였다. 
독립운동은 정치적 군사적 방면뿐만 아니라 민족문화 방면도 중요하다. 모국어 회복운동을 했던 ‘조선어학회’에 비해, 조선 민속을 연구했던 ‘조선민속학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어를 말살하여 언어적 국권이 사라질 때 그는 민속어와 토속어를 조사하여 1,286개를 주해하여 최현배, 정인섭과 함께 『조선말 큰 사전』 편찬 작업을 하였다. 
자민족의 문화적 유산과 정체성을 잃으면 식민지배가 공고화된다.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여 학회를 결성하고 민속 현지를 조사하고 사진 촬영하고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방송하고 경연을 열고 잡지를 발간하고 박물관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울산에서 송석하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그를 친일 모리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 송태관이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잘못 알려져 송석하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송태관은 황실의 시종부원경을 지낼 때 고종 양위에 반대하여 진도로 1년 유배를 당했다. 그 후 부산・울산에서 사업가로 활동했다. 1907년 울산군 19개 면 학교 신축비로 30원을 기부했고, ‘병영초’ 교장을 지냈고, ‘언양의숙’에 기부금을 냈던 송태관은 1917년 일제로부터 훈4등, 훈3등 서훈을 취소당한다. 1919년 이후 부산의 백산 안희제가 만든 ‘기미육영회’ 회원으로 유학생을 지원하고, ‘조선교육개선건의안’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상해 임정에 독립자금을 지원한 경남은행장을 지냈고, 모교인 부산상업학교(현, 부산 개성고)가 부산 서면으로 이전할 때 총 기부액의 70%에 해당하는 2만4,550원을 기부하였다. 거부이자 대지주였기에 그는 울산지역에서 긍정적 이미지가 없다. 송태관은 자본가이기에 사업적 친일을 했을지라도 적극적 친일을 한 적은 없다. 설령 아버지가 친일했다고 그 자본으로 민속을 지키려 한 송석하까지 매도할 이유는 없다. 
한글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최현배를 기리듯이 한국의 민속 문화를 보존 유지하는 문화적 독립운동을 한 송석하를 기념하는 일은 당연하다. 현재 울산에서 송석하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상북면의 양등마을 생가는 옛 흔적이 없고 재실은 무너지기 직전이다. 삼남면 소가천의 재실(별장) 역시 관리 부실로 훼손이 심각하다. 
송석하는 고향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석남사의 석남이 바로 그의 호이다. 울주군 상북면 고향 마을에 민속 연구, 공연, 기념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송석하 민속기념관’을 세워 그를 기리고, 민속 공연인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는 영남알프스(산무리) 관광과 연계될 수 있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