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의 개발폭풍 이후 논밭이었던 남구 달동 등은 아파트 신시가지로 변모했다. 울산매일 포토뱅크 iusm@iusm.co.kr

1992년은 울산매일신문이 이 세상에 태어난 해다. 지금으로부터 햇수로 20년 전이다. 필자는 울산매일 창간 20년 되는 해를 맞아 울산의 지난 20년, 무려 7,300일을 넘는 긴 시간을 어떤 관점에서 돌아볼 것인가 고민했다. 그러나 결론은 <도시>문제를 중심으로 돌아보는 쪽으로 굳어졌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니, 도시역사를 주된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는 필자로서는 달리 선택할 것이 없었다.
우선 1990년대 10년간의 울산을 돌아보기 전에 1980년대와 90년대의 대한민국을 잠깐 둘러보자. 198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 사후 신군부의 철권정치를 거쳐 1987년의 민주화선언이 이어진 격동의 시기였다. 이 해를 전후해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이 이 땅에서 열렸고, 1989년에는 해외여행자유화가 시작되는 등 90년대 이후 도래하는 본격적인 <세계화>의 싹이 튼 시기가 80년대 후반이다. 정치 외교적으로는 1991년 9월17일에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고, 92년 8월 23일에는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졌다. 이어서 96년 10월 11일에는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하는 등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은 우리나라의 위상이 크게 올라간 시기였다.

 

광역도시계획·광역행정서비스 시대 개막
주요도로·번영교 등 태화강 교량 완공
옥동·무거·태화·다운동 택지 확장
남구 달동 등 신시가지 토지구획 정리
짧은 기간 집중개발로 새로운 과제 남겨

 

■대망의 광역시 승격과 새 도시계획

1990년대의 울산은 대한민국의 80년대 만큼 격동의 시기였다. 1995년 1월1일자로 통합울산시가 출범했고, 그해 6월 27일의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초대 민선시장으로 심완구씨가 당선돼 7월1일자로 취임했다. 이보다 앞선 1991년 4월15일에는 3월 26일 선거를 거쳐 초대 울산시의회가 개원했다. 당시 의원들 면면을 보면 후에 국회의원, 구청장, 시의회 의장 등으로 활약하는 조용수, 김무열, 윤두환, 이채익씨 등이 보인다. 이어 1997년 7월15일에는 대망의 광역시 승격이 이뤄졌다. 광역시 승격은 95년 8월31일에 승격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이 일은 시대적 요구였다.
이러한 90년대의 울산발전은 80년대에 이미 토대가 놓이기 시작했다. 이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울산의 인구변화를 잠깐 살펴보자. 1962년 시 승격당시의 울산시와 군의 인구는 21만 2,000명 정도였다. 이것이 73년에는 30만명을 돌파했고, 이어서 77년 40만명, 79년 50만명, 83년 60만명, 87년 70만명, 90년의 80만명에 이어 93년에는 90만명을 돌파했고 드디어 1997년에는 100만명을 뛰어 넘었다. 1970년부터 1997년까지 거의 2~4년마다 10만명씩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70만명을 넘어서는 87년 전후부터는 새 도시계획 패러다임이 요구됐다. 즉, 광역도시계획, 광역행정서비스가 필요해졌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1986년 5월14일자로 100만명 인구를 목표로 하는 울산 최초의 도시기본계획이 승인됐고, 1993년 6월15일에는 2011년을 목표연도로 계획인구 120만명의 2차 도시기본계획 변경안이 승인됐다. 올해가 이 계획의 목표연도니 인구예측은 어느 정도 맞았다.
광역시 승격을 며칠 앞둔 1997년 7월11일에는 통합시인 큰 울산 건설을 위한 <2016도시기본계획>이 인구 150만명을 목표로 수립·승인됐다. 이 계획을 보면 2011년의 목표인구가 140만명으로 돼 있으니 인구 추정치에 문제가 있었다 하겠다.
이러한 법정 도시계획 외에도 <울산태화강연안종합개발계획(1989)>, <2000년대 공업도시울산(1990, 울산상공회의소)>, <울산광역시도시계획 타당성 연구(1989, 울산시)> 등이 있었으나 모두 자문이나 건의 등의 의미에 머물러 있어 울산발전 밑그림으로 기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광역시 모습 갖추게 된 도시기반시설

그러나 이런 여러 계획은 1990년대의 울산 도시개발 방향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고, 이때 도입되기 시작한 도시기반시설이 현재 울산시의 모습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개발양상을 개괄해 보면, 먼저 도로와 교량의 경우는 번영교 반폭 가설(1990), 학성교 가설(1993), 삼일교 가설(1993), 신삼호교 가설(1994), 명촌교 확장 개통(1998)이 있었으니 태화강 위 교량은 모두 1990년대 말 이전에 개설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개설된 주요도로는 1991년에 유곡천 복개도로가 준공됐고, 남부순환도로가 1993년에, 북부순환도로가 1997년에 각각 준공됐다. 1996년에는 방어진 해안도로가 준공됐고, 1999년에는 태화강 강북 제방겸용도로가 준공됐다. 번영로의 경우는 야음삼거리부터 병영삼거리 구간이 2000년까지 점진적으로 개통됐다.
90년대 울산에서 일어난 도시변화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택지개발에서 찾을 수 있다. 공해문제가 심각했던 70~80년대의 울산에서는 공해이주사업이 큰 이슈였다. 많은 예산이 투입되면서 생겨난 택지개발사업은 주로 옥동과 무거동, 태화동, 다운동 일대에서 추진됐다. 울산시와 토지공사, 주택공사가 시행한 택지개발은 1984년의 옥동지구 개발을 시작으로 태화, 다운, 삼호1,2, 굴화, 옥현, 굴화2지구 등으로 이어졌다. 이 사업으로 지금의 남구 옥동 시가지와 무거동 옥현주공아파트, 삼호동 와와지구, 태화동 불고기단지 등의 시가지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밖에 울산을 바꾼 도시개발 사업으로 1990년대의 토지구획정리 사업을 들 수 있다. 1987년의 달리지구부터 본격 시작된 구획정리 사업을 통해 현재의 남구 달동, 삼산동 신시가지와 중구 성안지구, 동구의 문현, 화암지구, 울주군의 구영지구와 천상지구, 교동지구 등이 개발되었다. 이보다 앞선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주로 중구 우정동, 태화동, 옥교동, 학산동, 반구동, 남외동, 서동과 남구의 부곡동, 선암동, 야음동, 신정동에서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추진됐다.
이런 대규모에다 짧은 시간에 집중된 도시개발 사업은 필연적으로 지역의 명소와 역사유산을 파괴하기도 했다. 남외지구 개발로 병영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1985년에 있었고, 이어서 1987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정작 정비계획은 1997년에야 수립되었다. 이후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곳에 대한 토지매입만 이루어졌을 뿐 도시계획적 관점에서 보존대책이 고려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병영성의 성벽을 제외한 기타 시설에 대한 복원정비는 사실상 쉽지 않아 보인다.

■봇물 이룬 공공청사 신축과 이전

이외에도 울산의 1990년대는 시세가 크게 확대된 만큼 각종 공공청사 건축과 이전이 봇물을 이뤘다. 1991년에는 동부경찰서가 생기고, 중구청사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갔다. 옛 중구청사는 1995년에 전격 철거되어 생을 마감하면서 60여년간  초대 울산읍사무소와 울산시 청사라는 역사적 의미도 함께 파묻혔다. 같은 해인 1995년에는 시청 제2청사가 준공되고 동구청사가 이전 개청했으며, 울산문화예술회관이 개관했다. 2000년에는 울산과학대학 동부캠퍼스와 울산기능대학이 문을 열었고, 동천실내체육관 준공과 충의사 개관이 이어졌다. 2001년에는 1997년에 신설된 북구청 청사가 준공돼 이전이 이뤄졌다. 이밖에 1998년에는 울산지방검찰청이 발족하고, 1999년에는 울산지방경찰청이 개소했다.
이렇게 돌아보면 1960년부터 80년대가 울산미포국가공단과 온산공단이 본격 개발된 산업단지 개발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본격적인 도시개발의 시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눈부신 외형적 성장으로 포장된 산업단지개발이나 도시개발 모두 설익은 방법론과 철학부재 아래 시행되면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많은 과제와 사회적 부담을 다음 세대의 울산시민에게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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